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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전쟁의 역사

개요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75,000명의 북한 인민군이 북쪽의 소련 후원을 입은 북조선 공화국과 남쪽의 친 서방 대한민국 사이의 경계선인 38선을 밀고 넘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냉전의 첫 번째 군사 도발이었던 것입니다. 7월에는 미국 군대가 남한을 대신해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미국 관리들이 우려한대로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 자체의 힘에 대항한 전쟁이었습니다. 초기에 38선을 앞뒤로 건넌 후에, 싸움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사상자를 쌓았고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한편 미국 관리들은 북한과 일종의 휴전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다른 대안으로는 일부에서 경고했듯이 그 전쟁이 러시아와 중국을 넘어 확산되어 결국 세계 3차 대전으로 갈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지만, 한국 전쟁은 1953년에 끝이 났습니다. 모두 합쳐 5백만명 정도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전쟁 중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한반도는 오늘날까지 분열된 채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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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두개의 한국

만약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유엔의 리더들)이 우리가 이 망할 전쟁을 치르는 가능한 장소 중 가장 최악의 장소를 찾는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다” 라고 미 국무 장관이었던 딘 애치슨(1893-1971)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반도는 20세기 초부터 우연히 미국의 무릎에 거의 닿아 있었고, 한국은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또한 세계 2차 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적인 일본 제국의 소유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1945년 8월, 미국무부에서 두 젊은 보좌관은 한반도를 38선을 따라 절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북쪽은 소련이 점령하고,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말에는 두 개의 새로운 국가가 한반도에 형성되었습니다. 남쪽에는 반공산주의 독재자 이승만이 미국 정부의 마지못한 후원을 즐겼고, 북쪽에서는 공산주의 독재자 김일성이 소련의 좀더 적극적인 후원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양쪽의 독재자 모두 38선의 자기 쪽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기에 국경의 소규모 충돌은 일반적이었습니다. 10,000명에 가까운 남북한 군인들이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망하였던 것입니다.

한국 전쟁과 냉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공은 미국 관리들에게 놀라운 경고였습니다. 그들이 우려했던 대로 이 전쟁은 단순히 지구촌 다른 지역의 불안정한 두 독재 정권의 국경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세상을 정복하려는 공산주의 운동의 첫 번 째 단계였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최고 의사 결정자들에게 내정 간섭은 옵션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1950년 4월에 NSC-68로 알려진 국가 안전 보장 이사회 보고서는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주의가 발생하는 것을 “포함”하는 어느 곳에서나 “본질적인 전략이나 그 문제의 땅의 경제적인 가치에 관계없이” 군사력을 동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국을 넘어지게 둔다면 소련이 즉시 하나씩 차례로 삼킬 것이다” 라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1884-1972)이 말했습니다. 한반도의 전쟁은 동방과 서방, 선과 악 사이의 지구촌 분쟁의 상징이었습니다. 북한군이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밀고 들어왔을 때, 미국은 공산주의 자체를 대항하는 전쟁을 위하여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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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전쟁이 방어적인 것-공산주의를 남한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 이었는데 그것이 연합군으로 악화되었다. 북한 군대는 군기가 잘 잡혀있었고, 잘 훈련되었으며 잘 갖추어져 있었는데, 반대로 이승만의 군대는 두려워하고, 혼돈되었으며, 어느 도발의 전장에서도 도망하는 편이었습니다. 가장 건조하고 무더운 여름 중의 하나로 기록된 여름에 필사적으로 목마른 미군은 인분을 준 논에서 물을 마실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위험한 장 질환과 다른 질병의 계속적인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여름의 끝에, 트루먼 대통령과 아시아 지역 담당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새로운 세트의 전쟁 목적을 결정했습니다. 이제 연합군을 위해 한국 전쟁은 공격적이었는데 그것은 북한을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새로운 전략이 성공적이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은 북한을 서울에서 몰아내고 그들을 38선을 넘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국경을 넘어 북한과 중공 사이의 경계인 압록강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 중국은 그들이 말하는 “중국 영토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리더인 마오 쩌둥(1893-1976)은 북한에 군대로 보내고, 유엔군에게 전면전을 원하지 않으면 압록강 경계로부터 떠날 것을 경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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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코 트루만 대통령과 그의 고문단이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 같은 것이 유럽에서 소련의 침략과 핵무기의 전개와 수백만의 무의미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에게는 이 전쟁을 더 넓게 확산시키지 않는 어떤 것은 공산주의자에게 용납할 수 없는 항복을 하는 “회유”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맥아더는 그것을 도발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마침내 19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맥아더의 지원을 공유하고, 또한 그 편지를 언론에 누출시킬 수 있는 공화당 지도자 조셉 마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맥아더는 국제 공산주의를 대항하여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썼습니다.

트루먼에게 이 편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4월 11일, 대통령은 명령 불복종에 대하여 장군을 해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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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상태

1951년 7월에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새로운 군 사령관은 판문점에서 평화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판문점 협상이 지연됨으로 38선을 따라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양측은 38선 경계를 유지하는 휴전을 수락하기 원했지만 전쟁 포로를 강제 “송환”해야 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중국과 북한은 동의했고, 미국은 반대했다). 마침내 2년 이상의 협상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적대국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계약은 포로들이 좋아하는 곳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했고, 38선 근처에 남한에 1,500 평방 마일의 영토를 주는 새로운 경계를 그렸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2마일 넓이의 “비무장 지대”를 만들었습니다.

한국 전쟁의 사상자

한국 전쟁은 상대적으로 짧지만 유난히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거의 오백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중의 절반 이상이 –한국 전쟁 전 인구의 약 10%- 민간인이었습니다. (이 민간인 사상자 비율은 세계 2차 대전과 베트남 전보다 높았다). 거의 40,000명의 미국인이 한국에서의 활동으로 사망하고, 100,000 이상이 부상을 당했습니다.